monthly_bookshelf_201709

스무 살 무렵, 한 앳된 얼굴의 소설가에게 ‘취향저격’을 당했다.(윽)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돌아보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뇌의 한 부분에 ‘반짝’하고 형광등이 켜진 듯했다. 이유는 하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이 섬뜩하리만치 나와 내 주변의 일상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피우는 담배와 사용하는 휴지의 종류, 흑미 햇반만을 고집하는 등의 소비 행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행위이자 평범한 대한민국의 시민임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숱하게 드나들던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에게 자신을 소개하려 항상 사가던 물건들을 나열하자 아르바이트생은 말한다.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 (『달려라 아비』중「나는 편의점에 간다」)

이름 대신 고시원의 ‘1번 방 아가씨’라 불리는 주인공은 자꾸만 도난 사건의 범인을 찾으려 다른 방들에 들어가는데, 문을 열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경악스럽다.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튀어나와서가 아니다. 모두의 방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방안에는 세 칸짜리 분홍색 서랍장 하나, 오른쪽 모서리 귀가 닳은 한 칸짜리 금성 냉장고 하나 (중략) 책장에는 몇 개 안 되는 CD와 책들이 있다. 서태지, 김현철, 이승환, 너바나, 비틀즈 등의 CD다.” (『달려라 아비』 중「노크하지 않는 집」)

작가는 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나 그리고 우리는 누구이며 세상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당시 김애란 작가의 나이는 스물다섯 남짓. 이렇게 작가는 존재, 개성, 정체성 따위를 고민하던 나를 건드리고 들쑤셔놓았다.

‘덕심‘이란 게 그렇지 않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하지만 작은 불씨 하나는 늘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것. 얼마 전 출간된 작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은 무뎌진 내 덕심에 불을 지폈다. 스무 살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삼십 대를 달리는 내 현실과 고민들을 책 속에서 발견한 까닭이다.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로 끼고 집을 매매한 주인공. 명의만 내 것일 뿐 결코 내 것이 아닌 집에서 수십 년간 이자를 갚으며 살아야 하면서도 무리를 해서 집을 산 이유는 자라나는 아이를 생각해서다. 하지만 아이가 사고로 죽는다. 아이를 잃은 슬픔과 충격에 몰두할 틈도 없이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쌓여가는 대출금과 생활고다. 아이를 위해 산 집을 아이의 보험금으로 갚아야 하는 그의 현실을 그저 남의 이야기, 타인의 불행이라 일축할 수 있을까. (『바깥은 여름』 중「입동」)

지방 소도시를 오가며 시간강사를 하는 주인공. 서울 토박이인 그는 출퇴근 길 버스 차창 밖으로 변화하는 풍경을 보며 자신의 인생 역시 중심부에서 멀어짐을 느낀다. 그런 그에게 정교수에 가까워질 기회가 주어지는데, 승진을 눈앞에 둔 다른 교수의 ‘거부할 수 없는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풍경은 쉬이 바뀌질 않고 마치 스노우볼처럼 “안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인생의 시차, 나와 타인의 시차만을 확인한다. (『바깥은 여름) 중「풍경의 쓸모」)

작가의 처녀작과 최근작을 함께 읽으며 지난 10년 동안 내 삶이 어디에서 여기로 움직였는지, 나의 생각과 고민은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를 향하는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때론 내가 깨닫지 못한 깊숙한 곳의 응어리를 건드리는 작가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물론 (종신 옹을 비롯한) 누군가에게는 가소로울 것이다. 고작 삼십 정도 먹고서는 나이 듦에 대해 얘기한다고? 하지만 귀엽게 봐주시라. 우리 인생의 온도와 시차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려라 아비』
  지은이 김애란 / 출판사 창비 / 출간일 2005-11-29

『달려라 아비』는 출생과 성장의 과정과 관련된 모티브를 주로 다룬 김애란의 첫 소설집이다. 2005년 한국일보문학상에서 수상한 신예작가인 그가 2003년부터 쓴 단편들을 모아 엮었다. 공원에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몇십년이 지난 뒤 수족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되는 「사랑의 인사」, 만삭의 어머니를 버려둔 채 집을 나간 아버지를 상상하는 딸을 그려낸 표제작 「달려라 아비」, 종일 단칸방에 틀여박혀 텔레비전만 보는 아버지를 엉뚱한 발상과 밀도 높은 심리묘사로 그려낸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를 포함한 총9편의 단편들을 수록했다. 작가는 수상작 「달려라 아비」를 비롯,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 등으로 상처입은 주인공이 원한이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기긍정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일상을 꿰뚫는 민첩성과 기발한 상상력, 탄력있는 문체로 그려낸다.

『바깥은 여름』
  지은이 김애란 / 출판사 문학동네 / 출간일 2017-06-28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김애란의 신작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서는 제3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포함한 일곱 편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작품 「입동」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부서진 일상을 따라가며 독자로 하여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다가도, 그 고통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게 만든다. 십대 무리와 노인과의 실랑이 끝에 노인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 후 그 사건의 목격자인 ‘나’의 아들 ‘재이’가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편견에 둘러싸이고, 그런 편견 사이에서 천진하다고만 생각한 아이에게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가리는 손」 등의 작품을 통해 가까이 있던 누군가를 잃거나 어떤 시간을 영영 빼앗기는 등 상실을 맞닥뜨린 인물들, 친숙한 상대에게서 뜻밖의 표정을 읽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