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홍대의 유서 깊은 클럽에서 〈흥부가〉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창덕궁 비원 정자 연회에 초대된 기분이었다. 비록 ‘카타콤’을 자처하는 곰팡내 나는 지하 술집, 사오십 대 아재들의 추임새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옆에 끼고 소리를 들으며 술을 푸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었다. 그런데 ‘박타령’을 듣다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흥부가 제아무리 가난이란 원수 놈에 지독하게 시달렸을지언정 그의 나이 마흔이 채 안 되었을 터, 아직 창창한 나이에 너 참 수고했다, 착한 너 이젠 행복하게 살아라, 금은보화 벼락을 맞았으니 그만하면 감당해볼 만한 수난 아니던가. 고진감래할 리 없는 사람들이 불콰한 얼굴로 좋다고 박수를 쳐대는 모습이 서글퍼 잡은 애인의 손을 꽉 쥐었다.

소박한 우리 술벗들이 소설의 구절을 안주로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빠른 유속의 물가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낚아 올리는 것 같다. 나는 물밑으로 고개를 넣고 유영한다. 빚을 청산하고 싶다. 창녀도 아닌데 일을 할수록 빚이 는다. 어쭙잖은 문장을 품고 부유하다고 자위하고 싶지 않다, 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옷을 버린다, 책을 버린다. 수사修辭를 버린다, 미문을 경계한다, 책에 밑줄은 긋지 않는다. 문장에 감화되지 않는다. 스케일이 큰 영미권 소설이나 SF 소설을 가끔 본다. 앙상하게 그 와꾸만 남긴다. 오롯이 혼자서 고독하고 싶다, 마이너스가 아닌 제로가 되고 싶다.

교정 교열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개발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제목도 외형도 근사한 《동사의 맛》을 기꺼이 보았다. 품사 중에서도 동사라니, 튼튼한 와꾸의 필수 요소 아니겠는가.

자기계발서를 펼쳤는데, 읽은 건 소설이었다. 이름도 없는 남자와 여자가 쓰임이 헷갈리거나 사용이 무딘 동사의 예를 보이기 위해 등장한다. 책의 저자처럼 쉰을 코앞에 둔 남녀, 도서관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척이다 눈이 마주쳤다. 만남은 ㄱ. 정신을 ‘가다듬’고 벌여 놓은 것들은 ‘간추리’러 간 곳이 도서관이다. 그러다 나중엔 두 사람이 살림을 합치는 상상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니까 연애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건 오직 그들의 대화뿐이다. 동사 데이트라고 부를 수 있겠다.

남자가 여자에게 밑도 끝도 없이 “날 한번 당겨 보세요”라고 말한다. 그건 〈당기다/댕기다〉의 쓰임을 설명하기 위한 거다. 나의 애인은 가끔 엄지손가락을 들어보라는 둥 여길 쳐다보라는 둥 연유를 알 수 없는 요청을 한다. 서로 ‘끼치’고 ‘미치’기 위해 하는 몸의 동사들. 책 속에서는 마흔아홉들의 대화라 그 결이 만만치 않다. ‘동사를 사용할 것’이라는 유일한 규칙이 있을 뿐, 이 이야기엔 플롯도 사건도 없다. 우리의 연애처럼, 우리의 삶처럼. 그저 움직임이 쌓일 뿐이다. 그래서 중간부터 읽어도 그만, 읽다가 말아도 그만이다. 어차피 먹다가 말고, 쓰다가 말고, 사랑하다 말고, 살다가 마는 우리네 아닌가.

그렇게 아무렇게나 앞뒤 없이 넘겨보다가 〈애끊다/애끓다〉 챕터에서 울어버렸다.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전쟁통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더니, 아들을 살아 만나 기쁜 할머니가 밥을 차리겠다고 열무를 뽑다가 불발탄이 터져 폭사한 이야기를 한다. 창자가 쏟아져 나왔는데도 숨이 붙어있어서 남자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안고 뛰는데 쏟아진 창자를 들고 애끊게 뒤쫓는 아버지. 어머니를 여윈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열무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애끓는 이야기. 차마 밑줄을 그을 수 없는 선명한 말과 쓰임.

남자가 우울감에 빠지면 여자는 같이 우울해하자고 한다. 그저 손을 잡고 서로 말고는 누구의 삶에도 ‘헤살’을 놓지 않고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해찰’을 부리면서 함께 앉아 멀거니 비 오고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자고 한다. 그리고 예견되었듯 ㅎ에서 이들은 이별한다. 마지막 동사 〈희뜩거리다/희번덕거리다〉에서 남자가 사라진다. 너무 시시하고 덤덤해서 내 것 같은 이 연애가 슬프다면 괜찮다. 우리는 ㄱ으로 다시 옮겨가 복습을 하면 된다.

<동사의 맛>
지은이 김정선
출판사 유유
출간일 2015-04-04
한국어에서는 동사만을 가지고 문장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한국어는 동사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사는 한국어 관련 책에서 외면받기 일쑤였다. 20년 넘도록 문장을 다듬어온 전문 교정자인 저자는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를 제대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책이 마땅치 않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고, 이 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헷갈리는 동사를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표제어는 찾기 쉽도록 사전처럼 배열하되 ‘남자’와 ‘여자’의 에피소드를 활용하여 한 편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동사의 뜻풀이와 활용형을 밝혔고, 예문을 통해 기본형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꾸몄다. 일반 독자는 물론 작가, 번역가, 편집자 등 글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