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 ‘분명히 내가 뭘 하고 있기는 한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하는 일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정점에 달해 있을 때였다. 그때 동료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바로 ‘기획’이라고. 뭔가 하고 있기는 한데 자기도 뭘 하는지 모르고 남들도 저 사람이 뭘 하는지 모르는 게 바로 ‘기획’이라고. 그러니까 너는 지금 ‘기획’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게 농담이었는지 위로였는지 자조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의 내게 그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고, 아마도 그때부터 ‘기획’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여기다 붙여도 되고 저기다 붙여도 되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러므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

‘기획’이란 일 혹은 말의 범용성에 대해 고민했던 게 나만은 아닌 듯싶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기획’이란 말을 살펴본 뒤 공통점을 발견하고(“목표한 대상으로부터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행위.”) 자신만의 정의(“상대를 설득하고 도발하고 유혹하고 튕기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를 내린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은 그 자체로 ‘기획적’이다. 대입 실기를 준비하고, 과제 발표를 준비하고,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준비하고, 프로포즈를 준비하는 등의 모든 일이 ‘기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그리고 의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기획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획’이란 실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 전부일지도 모르는 일, 공집합보다 전체집합에 가까운 일,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기 때문에 막연하고 버거운 그런 일인 것이다.

<예능, 유혹의 기술>은 ‘기획’의 망망대해에서 헤엄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 땅에 살고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TV 예능 프로그램을 매개로 한다. 저자는 <무한도전>, <1박 2일>, <일밤>,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 등 2000년대 이후에 제작된 TV 예능 프로그램의 기획 요소를 두루 살펴보고, 성공한 기획에서는 성공의 원인을, 실패한 기획에서는 실패의 원인을 찾는다. 이 책은 실용서를 표방하며 실제로 실용적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술’이라는 게 아무런 알맹이도 없이 얄팍한 구호로만 존재하는 그런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정확하고 예리한 분석과 함께 제시되는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혹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하나의 인생으로 읽히며,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각자의 삶을 돌아보고 점검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기획’할 수 있을지 고심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뭘 하고 있기는 한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디지털 매거진 <월간 윤종신> ‘B-Side’ 코너를 맡고 있는 TV 칼럼니스트 이승한의 첫 책이다.

『예능, 유혹의 기술』
지은이 이승한
출간정보 페이퍼로드/ 2017-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