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책장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또 누군가의 책장으로 들어갑니다. 책장의 주인공은 영화 평론가 이동진입니다. 그는 <밤은 책이다>에서 자신을 “책에 관한 한, 쇼핑 중독자, 허영투성이, 고집불통”이라고 말합니다. 하루에 열아홉 권의 책을 사기도 하고,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훨씬 빠르며, 베스트셀러 순위는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열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야행성인 그는 주로 밤에 책을 읽습니다. 밤은 오롯이 혼자가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밤에 대해 이렇게 적습니다. “말하자면 밤은 치열한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부드러운 동화가 시작되는 시간일 거예요. 괘종시계가 열두 번을 치고 나면 저마다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소년과 소녀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지요.” 그가 읽는 책들은 소설, 에세이, 역사학, 철학, 종교학, 심리학, 예술, 영화 등 무척 다양합니다. 책을 읽은 감상을 바탕으로 그가 새롭게 자아내는 이야기들도 흥미롭습니다. <안경의 에로티시즘>을 읽으면서는 직장을 나와 우울한 날을 보내던 중 빨간색 뿔테 안경을 사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빨간 안경의 비밀이 나옵니다. <백야>를 읽으면서는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삶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면 오히려 작은 행복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며 비관주의자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지요. 책 속의 책들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이동진 작가가 자신만의 이야기로 어떻게 독서를 완성했는지 함께 음미하는 즐거움이 상당합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책 자체에 지칠 때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책과 씨름했으니 일이 끝난 뒤에는 책에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은 거지요. 3년 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막막했을 때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것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매일 밤 한 권 한 권의 책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자유롭게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을 그저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한 페이지에 몇 행의 문장을 집어넣을지, 책을 만들 때 어떤 종이를 쓸지, 이 작가와 다음 책을 기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 목적의식 없이 오롯이 독서에 집중하며 ‘아, 책이란 게 원래 이렇게 재밌었지.’ 하고 다시금 깨닫는 나날이었습니다.

파스칼은 “모든 불행의 근원은 한 가지다. 인간에게는 조용히 혼자서 자신의 방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홀로 방에 있다 보면 정체 모를 아득함에 짓눌릴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밤의 어둠은 그 불안의 농도를 더 짙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책을 매개로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렙니다. 당신의 책장은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나요? 홀로 남은 당신의 손에는 어떤 책이 들려 있나요? 본 적 없는 당신이 그리운 밤입니다.

<밤은 책이다>
지은이 이동진
출간 정보 예담 / 2011-12-20
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함께 읽는 책 <밤은 책이다>는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책을 섭렵하는 독서가로도 유명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독서 에세이이다. 깊은 밤이나 고요한 새벽에 읽기 좋은 77권의 책들을 소개하며 그에 대한 감상을 덧붙인다.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은 시와 소설 등 문학 작품부터 인문, 과학 교양서, 예술서까지 분야와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MBC 라디오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과 〈이동진의 문화야 놀자〉에서 직접 쓰고 낭독한 원고들을 보완하고 다듬어 글로 엮은 덕분에 작가가 말하듯 서술되어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여행자였던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세계 각지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함께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