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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지 올해로 10년이 됐지만, <칠드런 오브 맨>(2006)은 언제 봐도 소름 끼치는 예언으로 다가온다. 정부는 우울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살 약의 판매를 허가하고, 죽음은 상품이 되어 TV 광고를 탄다. 세상에서 제일 어린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생활을 잃은 채 유명인으로 살아가던 디에고(후안 자쿠지)는 팬에 의해 살해 당하고, 미디어는 그 사건을 포장해 팔아 사람들의 눈물을 짜낸다. 정부는 불법 이민자가 사회를 무너뜨릴 거라며 이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공권력은 제 잇속을 챙기는 일에 몰두한다.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이들조차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생명을 수단으로 여기는 폐허.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게 기분 탓일까? 그럴 리가. SF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인용하자면,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

확고한 희망으로 결말을 내린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아무 것도 장담하지 않는다. ‘미래’ 호의 선원들이 키(클레어 호프 아쉬테이)와 아이를 구출하는 장면 같은 건 없다. 망망대해에서 출렁거리는 조각배에 몸을 의탁한 채 멀리서 오는 배를 보며 아득한 희망을 걸어보는 불법 이민자 출신 소녀와, 그 위험천만한 품 안에 안긴 아이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란다. 바다 위를 자욱하게 뒤덮은 물안개를 뚫고 미래 호가 도착하는 모습은 정말 키가 본 광경일까, 죽어가던 테오(클라이브 오웬)의 상상인 걸까? 암전된 화면 너머 들려오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는?

<칠드런 오브 맨>의 청회색 화면에서 갑자기 지브리의 총천연색 화면으로 점프하는 건 좀 낯선 일이겠지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은 세계의 폭력을 본질까지 들여다본다는 점에선 <칠드런 오브 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속 너구리들은 개발로 인해 망가지는 타마 산을 지키기 위해 안 하는 게 없다. 귀신으로 둔갑해 공사장 인부들을 겁주고, 영험한 불상으로 둔갑해 개발 여론을 보존 여론으로 바꿔보려 노력도 해본다. 강경파 너구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인간과의 일전을 벌이자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결국 타마 뉴타운 개발사업을 막아내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채 뿔뿔이 흩어져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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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6,70년대 일본 신좌파 학생운동의 몰락을 은유한 작품이라고 추측하지만, 나는 22년 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를 이리도 닮았을까 싶다. 자본의 논리 때문에 홍대에서, 해방촌에서, 가로수길에서 밀려나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얼굴, 항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유산인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이 재개발로 허물어지는 오늘날의 광경들이 자꾸 1994년의 화면 위에 겹쳐 보이는 것이다. 겁을 줘서 인부를 쫓아내면 다음 날 새 인부들을 고용해 공사를 계속하는 영화 속 자본의 강인함이란 시간을 역으로 거스른 기시감을 안겨준다. 마치 <칠드런 오브 맨>에 묘사된 벡스힐 난민 캠프와 반이민주의 정서 위에, 시리아 난민을 거부할 권리를 요구하며 브렉시트를 감행해버린 2016년의 영국이 겹쳐 보이는 것처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자본에 밀려 난민이 된 이들이 표류하는 과정의 본질을 꿰뚫는다. 세월의 흐름이나 맥락 따위에 변하지 않는 폭력의 본질을.

“TV에서 그러잖아요, 개발 때문에 너구리나 여우가 모습을 감추었다고. 그런 말 말아 주시겠어요? 너구리와 여우는 둔갑해서라도 살고 있습니다만, 둔갑도 못 하는 토끼와 족제비는 전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영화의 마지막, 인간으로 둔갑해 살아가던 너구리 쇼키치(노노무라 마코토)는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뉘앙스로 끝난 <칠드런 오브 맨>보다 한층 더 암울한 결말 앞에서 나는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게. 골목마다 소박한 가게를 꾸리던 자영업자들은, 정치범이 된 가족의 옥살이를 뒷바라지하던 이들이 기숙하던 여관 골목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사라진 <칠드런 오브 맨>의 세계처럼, 우린 어느 날 갑자기 익숙한 이웃들이 다 사라진 세상을 살고 있다. 깁슨이 맞았다. 디스토피아는 이미 여기에 와 있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平成狸合戰ポンポコ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시놉시스
도쿄 근방의 타마(多摩) 구릉지. 다카숲과 스즈가숲, 두 무리로 나뉘어 살던 너구리들은 도쿄의 개발 계획인 ‘뉴타운 프로젝트’로 인해 그들의 숲이 파괴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지되어 있던 ‘변신술의 부흥’과 ‘인간연구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로 합의한다. 또한 시코쿠(四國)와 사도(佐渡) 지방에 살고 있는 전설의 장로 등에게도 원군을 청하기로 하고 ‘가위, 바위, 보 시합’을 통해 사자를 보낸다. 너구리들은 외부의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며, 변신술 특훈과 변신술을 이용한 게릴라 작전으로 인간들의 개발 계획과 공사를 방해하지만 결국 ‘뉴타운 개발 계획 저지’에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 그토록 기다리던 전설의 장로 3명이 시코쿠 지방에서 온다. 3명의 장로는 너구리 변신학을 집대성한 『요괴대작전』을 실행할 것을 선언한다. 이 작전을 경험한 인간들로 하여금 다시 너구리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품도록 함으로써 뉴타운 개발 계획을 백지화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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