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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최악의 하루>(2016)의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가 던지는 거짓말들은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니다. 자신을 다른 여자 이름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현오(권율)에게 불 같이 화를 내고, 전처와 재결합할 거라면서 자신에게 미련이 있는 것처럼 구는 운철(이희준)을 지긋지긋해 하지만, 정작 은희 본인도 현오와 운철을 같은 시기에 만나고 있었으니까. 진심으로 자신만을 바라봐 달라고 화를 내기에는 본인부터가 딱히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은희가 밉지 않을까. 아마 자신을 지키기 위해 크고 작은 거짓말들을 별 다른 악의 없이 던져봤던 경험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겠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스스로 제일 잘 알면서도 말하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진심으로 믿어버리게 되는 생시 같은 거짓말. 실제 삶은 형편없이 꼬이고 안도할 일 따윈 없지만, 지리멸렬한 인생 같은 건 진심으로 자아낸 근사한 거짓으로 잘 덮어 서촌과 남산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묻어두고 싶지 않나.

<트랜스아메리카>(2005)의 스탠리, 아니 브리(펠리시티 허프먼) 또한 그럴 수 있길 바랐다. 그리도 고대하던 성전환 수술은 일주일을 앞두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시스젠더 여성인 척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모든 게 다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 대륙 건너편 뉴욕에서 연락이 온다. 아드님이 지금 구치소에 갇혀 있으니 보호자가 와서 꺼내 가시라고. 젊은 시절 하룻밤 불장난의 결과로 있는 줄도 몰랐던 아들이 생겨버린 브리는 어떻게든 아들 토비(케빈 지거스)를 떼어놓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렇다고 친부를 찾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내가 네 아버지란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 브리는 끝없이 거짓말을 늘어 놓으며 토비와 함께 미 대륙을 횡단한다. 이 거짓말로 어떻게든 제 자신과 친부의 정체를 알게 되면 실망할 토비의 마음을 지켜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하지만 어디 그게 마음처럼 되나. 진심으로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사소한 거짓말들이 하나 둘씩 드러나면서 함께 거짓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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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짓말들은 사실보다 더 진심에 가깝다. 은희는 연애 상대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단 걸 숨겼지만 각자와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무대 위에 오른 배우처럼 온전히 진심이었음을 주장했고, 그랬기에 상대의 부정에 진짜로 크게 상처를 입는다. 토비는 브리가 생물학적 남성이란 사실을 숨기고 여자인 척 했다며 화를 냈지만, 브리는 스탠리로서의 삶이 거짓이었던 거지 브리로서의 삶은 스스로에게 솔직한 것이라 믿는다. 복잡미묘하게 꼬여 모순투성이인 인생 속에서 어떤 한 면만이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사실은 마음처럼 풀리지 않고 진심은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그냥 거짓으로라도 이해 받고 싶은 은희와 브리의 소망은, 각각 늦여름 남산의 절경과 피닉스의 가정집에서 거짓말쟁이라는 손가락질과 함께 배신당한다. 그래,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적어도 거짓을 말하던 그 모든 순간 진심이었는데. 길 위에 홀로 남겨진 은희와 브리의 낙심이 무엇인지 우린 안다. 그냥 다치기 싫었던 것뿐이었던 소망이 깨지는 순간의 슬픔을.

뜻처럼 풀린 건 하나도 없지만, 은희는 자신처럼 ‘거짓말’이 직업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의 도움을 받아 하루를 마감한다. 꾸며낸 거짓말이고 그렇게 될 거라는 보장 따위는 없지만, 무표정하게 내리는 눈 사이를 걸어오다가 뒤를 돌아 어두어진 산책로 너머를 바라보고는 안심하며 행복해질 것을 꿈꾸는 미래를 상상해보며. 혹시 또 아는가. 어정쩡한 모습으로나마 토비를 다시 만나 함께 맥주를 마시게 된 브리처럼, 어쩌면 우리 인생에도 복잡하게 꼬인 진실과 그걸 덮어보려던 악의 없는 거짓을 조금이나마 이해 받을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러니 그 때까지는, 완전한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위안 삼아 버티며 이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조차 아무 가망 없는 거짓말인 걸 알지만 그래도.

<트랜스아메리카(2005)>
Transamerica
감독 던컨 터커
주연 펠리시티 호프먼, 케빈 지거스
시놉시스
여자가 되고 싶은 아빠 브리가 진짜 여자가 될 수 있는 수술을 일주일 앞두고 그 존재 조차 몰랐던 아들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대학시절 만났던 여자친구와의 사이에 자신도 몰랐던 아들이 있었던 것. 뉴욕 경찰서에 잡혀있는 아들 토비는 죽은 엄마에게 들은 자신의 생부를 찾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브리는 자신의 아들이라는 토비를 부인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도 없어 결국 토비를 찾아가고, 아빠를 찾아 LA로 가겠다는 토비를 양아버지에게 데려다 주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이 둘의 특별하고도 위태로운 미국 대륙횡단은 시작된다. 성전환자인 브리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즉 자신을 완벽한 여자로 만들어 줄 마지막 수술비를 벌기 위해, 2개의 직업을 갖고 정신없이 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남자였던 시절 낳았던 아들 토비가 감옥에 있다는 전화를 받게 되자 할 수 없이 신분을 숨긴 채 보석금을 내주고 처음 보는 자신의 아들과 어색하게 대면한다. <트랜스아메리카>는 던칸 터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하지만 여자로의 성전환을 감행한 남자와 특이한 상황에 직면해야만 하는 문제아 아들의 처지를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다루면서 관객을 몰입시키는 솜씨는 결코 신인답지 않은 내공을 보여준다. 브리 역을 맡아 열연한 펠리시티 호프만은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극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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