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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어수선한 영화 이야기’의 연말결산 ‘어수선한 시상식’을 녹음하는 동안, 일 년 내내 어수선했던 생각 하나가 뜻밖에도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여기서 ‘내내 어수선했던 생각’이란, “<버드맨>이 정말 그 정도로 좋은 영화인가?” 하는 생각을 말한다. 12년에 걸쳐 완성한 영화 <보이후드>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 만큼? 12년을 바쳐 필생의 역작을 완성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대신 각본상은 물론 감독상까지 싹쓸이 할 만큼? 정말? 그 정도로?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은 팟캐스트를 녹음하며 비로소, “<버드맨>이 정말 그 정도로 좋은 영화인 게 맞다”로 정리되었다. ‘잡담의 예기치 않은 미덕’으로 인해 그리되었다. 곱씹을수록 새삼스러운 영화의 진가에 다시금 감탄하다가 그리되었다.

자, <버드맨>의 첫 장면을 다시 보자. 팬티만 입고 카메라를 등진 주인공 리건(마이클 키튼)이 가부좌 틀고 공중부양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슈퍼히어로였던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인간의 행색을 하고서 지금, 허공에 떠 있다. 공중에 떠 있다는 건 중력에서 자유롭다는 뜻. 중력에서 자유롭다는 건 인간의 가장 큰 약점에서 자유롭다는 뜻. 하지만 그는 이미 날개를 잃었고 오래전 하늘에서 추방되었으니. ‘한물간 스타’라는 이미지의 중력에 붙들린 리건은 자신이 버드맨이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공상으로나마 잠시 제 몸을 허공에 띄울 뿐이다.

점점 궁지에 몰리던 퇴물배우 리건이 급기야 극장 밖으로 떠밀려 나와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맞이한 아침. 그의 마음 속 버드맨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리건의 타락과 타협을 부추기는 그 장면도 다시 보자. “바로 그거야! 크고 시끄럽고 빠르게 펑펑 터뜨려! 사람들의 눈을 보라고. 반짝거리잖아. 이런 걸 좋아하지. 피와 액션을 좋아한다고! 말 많고 우울한 철학 따위엔 관심이 없어!” 이윽고 한바탕 시끌벅적한 상상의 나래를 편 리건의 머리 위에서 날개 달린 버드맨이 속삭인다. “네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야. 세상 모두의 위.”

이처럼 <버드맨>은 어느 퇴물 배우의 아주 특별한 하룻밤을 그린다. 슈퍼히어로를 연기한 적도, 재기하려고 연극에 출연할 일도 없는 대다수 관객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리건을 주저앉힌 ‘중력’ 때문에 <버드맨>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버드맨에게는 있는, 하지만 리건에게는 없는 ‘날개’ 덕분에, 그의 하룻밤이 곧 나의 하룻밤이 된다. 중력. 이 압도적인 힘에서 자유롭게 해줄 날개가 없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결국, 같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의 끈질긴 욕망도 실은, 같다. 너무 다른 당신과 나, 하지만 우리 사이의 다르지 않은 그 한 가지 공통점에 대해서 나는 언젠가 이렇게 쓴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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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아이를 안아서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면 울음을 멈춘다. 그 상태에서 잠깐 손을 뗐다가 다시 잡아주기라도 하는 날엔 자지러지게 웃는다. 아이는 커서 트램펄린 위에 올라가 방방 뛰게 될 것이다. <씨네21> 이다혜 기자가 언젠가 자신의 칼럼에서 이렇게 회고한, 트램펄린의 그 야릇한 희열을 만끽하면서. “뭔지 모르겠지만 좋아 죽겠어. 그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을 만큼. 가능한 오래, 가능하다면 영원히.”
어른이 된 인간은 자신을 잡아끄는 악착같은 힘에 저항하며 한 뼘이라도 더, 1초라도 더 땅에서 멀어지는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래서 수직으로 점프해 가능한 오래 공중에 머무는 발레의 모든 동작을 만들었다. ‘왕의 남자’들이 줄 위에서 보여준 마지막 공중부양도, ‘국가대표’들이 눈보라를 뚫고 날아오른 스키 점프도 모두 같은 이유로 개발되었다. 그들이 중력과 싸워서 얻은 값진 승리의 순간들을 보며 우리는 열광한다. 아빠 머리 위에서 울음 뚝 그치고 자지러지게 웃을 때 이미 알아채 버린, 그 짧은 무중력의 아찔한 쾌감을 그들이 새삼 일깨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중력이란 그런 거다. ‘가능한 오래, 가능하다면 영원히’ 벗어나고픈 힘.”

– <시사IN> 318호, 영화 <그래비티> 소개 글 중에서

우리 모두는 별수 없이 리건이다. 우리 모두는 그래서 버드맨이고 싶다. 내가 발 딛고 선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 내가 아닌 나의 모습으로 ‘가능한 오래, 가능하다면 영원히’ 머물고 싶은 욕망. 우리의 그런 욕망이 리건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는 걸 눈치챌 때 비로소 이 영화의 진가를 알게 된다. 나를 주저앉힌 내 인생의 ‘중력’은 무엇이고 내가 갖고 싶은 내 삶의 ‘날개’는 무엇인지 생각하면서부터, 마침내 “<버드맨>이 정말 그 정도로 좋은 영화인 게 맞다”고 확신하게 된다.

자, 이제 <버드맨>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자. 텅 빈 병실 침대. 사라진 리건.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는 딸 샘(엠마 스톤). 처음엔 아래를 살핀다. 혹시 추락했나? 아니다. 이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다. 아빠가 허공에 떠 있(을 것이)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은 아빠의 형상을 상상하는 게 우리의 마지막 임무다. 그는 지금 버드맨의 형상으로 떠 있을까, 아니면 리건의 형상으로 떠 있을까? 날개를 펴고 공중부양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날개 없이 공중산책 하고 있을까? 내가 보고 싶은 형상은 둘 중 어느 쪽일까? 당신이 상상하는 리건의 마지막 포즈가 당신의 현재를 말해줄 것이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또 무엇을 욕망하는지, 허공 속의 버드맨(혹은 리건)이 가르쳐줄 것이다.

버드맨 Birdman (2014)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출연 마이클 키튼, 에드워드 노튼, 엠마 스톤
시놉시스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할리우드 톱 스타에 올랐지만 지금은 잊혀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그는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한다. 대중과 멀어지고, 작품으로 인정받은 적 없는 배우에게 현실은 그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
재기에 대한 강박과 심각한 자금 압박 속에, 평단이 사랑하는 주연배우(에드워드 노튼)의 통제불가 행동들, 무명배우의 불안감(나오미 왓츠), SNS 계정하나 없는 아빠의 도전에 냉소적인 매니저 딸(엠마 스톤), 연극계를 좌지우지 하는 평론가의 악평 예고까지.. 과연 ‘버드맨’ 리건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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