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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허공에의 질주> 마지막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안 보신 분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청춘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무대로 올라가 데이브와 화음 맞추는 대신, 그대로 공연장을 빠져 나와 혼자 자전거 타고 뉴욕의 밤거리를 내달린 <비긴 어게인>(2013)의 그레타처럼. 텅빈 학교 운동장을 빙빙 도는 자전거 위에서 “우리 이제 끝난 걸까?” 하고 묻는 신지에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하며 웃어주던 <키즈 리턴>(1996)의 마사루처럼. 우석이와 사귀다 헤어진 은주를 위로하던 밤, 그녀의 집까지 자전거로 바래다 주며 “이대로 부산까지 갈까?”하고 농담인양 진심을 털어놓은 <말죽거리 잔혹사>(2004)의 현수처럼. 영화 속 청춘은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우리에게로 온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저마다의 서툰 젊음을 낑낑대며 밀고 온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비틀대면서도 용케 중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청춘은 언제나 대견하다. 지금, <미라클 벨리에>의 폴라가 그러하듯이. 그때, <허공에의 질주>(1988)에서 대니가 그러했듯이.

대니(리버 피닉스)의 부모님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1971년, 한 군사 관련 실험실에 폭탄을 설치했을 만큼 반전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런데 비어있는 줄만 알았던 건물에 경비원이 있었고, 폭발 충격으로 그가 실명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인생 행로가 달라졌다. 그 후 15년. FBI의 끈질긴 추적을 피하는 동안 두 아들에게도 도망자의 인생이 대물림되었다. 6개월 마다 거주지, 이름, 머리색, 눈동자 색을 바꾸며 살아가는 네 식구. 이제 17살이 된 큰 아들 대니는 한번도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불의에 맞선 부모님의 삶을 존경하고, 의리와 신념으로 똘똘 뭉친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채고부터 마음이 흔들린다.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하려면 도망자의 굴레를 벗고 양지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꿈도 배반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 걸까? 대니가 감당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 볼수록 애처로운 영화. 그러나 대니가 내리는 힘든 선택과 결정의 모든 순간은 또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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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뭉클한 라스트 신으로 기록해도 좋을 <허공에의 질주> 마지막 장면에서, 꿈과 가족 사이를 서성이며 방황하던 열 일곱 살 청춘이 자전거를 타고 가족에게로 온다. 그때, 아버지가 말한다. “넌 다시 자전거를 타거라.” 그러고는 아버지가 운전하고 엄마와 동생이 탄 낡은 트럭이 대니와 자전거 주위를 한 바퀴 휘, 돈다. 아쉬운 듯 망설이듯 그렇게 아들 곁을 잠시 맴돌던 아버지의 트럭이 이윽고 흙먼지를 날리며 멀어져간다. “우리 모두 널 사랑한다. 함께 있든 없든 언제나 널 사랑한다. 너도, 우리도 열심히 살아보자. 어느 누구 앞에서도 너 자신을 속이며 살진 마.” 아버지의 따뜻한 작별 인사가 그 뽀얀 흙먼지 속에 남겨졌다. 이제 대니 곁엔 자전거뿐이다. 스스로 균형을 잡고 힘들게 페달을 밟으면서 온전히 자기 힘으로 밀고 가야 하는 인생이 대니의 몫으로 남았다.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이가 행여 쓰러질까봐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함께 달리는 부모의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스스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려는 자식을 위해 슬며시 손을 놓아주는 부모의 모습은 더 아름답다. <미라클 벨리에>도 <허공에의 질주>도 그 사실을 잊지 않은 덕분에 조금 더 근사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아이가 성장하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까지 보여준 덕분에 조금 더 고마운 영화들로 기억될 수 있었다.
실제 열 여섯 살 나이에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스타가 된 루안 에머라가 영화에서 열 여섯 살 폴라를 연기하는 생기 넘치는 순간. 실제 열 여덟 살 때 자신과 동갑내기 주인공 대니를 연기한 배우 故 리버 피닉스의 가장 빛나는 시절. 두 편의 영화를 함께 보면 좋은 또 하나의 이유. 두 편의 영화를 유난히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만들어준 신의 한 수. 어여쁜 배우들이 듬직한 이야기를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들의 자전거가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 위를 씽씽 달리게 될 것이다.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1988)
감독 시드니 루멧
출연 크리스틴 라티, 리버 피닉스, 주드 허쉬, 미샤 플림튼
시놉시스
1971년 네이팜탄 투하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군사 실험실을 폭파하다가 실수로 경비의 눈을 실명케 해 FBI에 쫓기며 15년간 도피생활을 해온 아더(Arthur Pope: 주드 허쉬 분)와 애니(Annie Pope: 크리스틴 라티 분) 부부. 이들은 두 아들 대니(Danny Pope: 리버 피닉스 분)와 해리는 부모와 함께 6개월마다 이름과 머리색깔, 눈동자색깔을 바꾸며 살아간다. 새로운 마을에 정착한 대니는 새로 들어간 학교에서 음악 선생인 필립스의 의해 피아노 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필립스 선생님의 딸인 로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언제 또 이곳을 떠날지 모르는 대니는 로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길 주저한다. 필립스 선생의 추천으로 줄리어드에 입학 시험을 보러간 대니는 재능을 인정받지만, 전에 다니던 학교의 기록이 없기때문에 입학이 어려워진다. 필립스 선생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머니 애니는 대니의 장래를 위해 친정부모에게 그를 맡기려고 하고, 이번 일로 인해 FBI가 자신들을 추적할 것이라고 생각한 아더는 마을을 떠날 준비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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